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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철리 무쇠달 마을

하루 네 번 기차가 서는 마을
소백산 3자락길의 시작점이자 1900년에 가까운 역사가 흐르는 죽령옛길이 지나는 마을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 ‘무쇠달 마을’입니다.

‘무쇠달 마을’ 이름의 유래

우리가 익숙하게 부르고 지나치는 수 많은 마을들의 이름에는 다 저마다의 뜻을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마을의 특정한 기후 때문에 지어진 이름도 있고, 주변 지형에 맞춰 지어진 이름도 있고, 돌이 많아서, 대나무가 많아서, 우물이 있어서 등의 다양한 이유들로 오래 전 우리 조상들은 마을마다 그에 맞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그런데 ‘무쇠달 마을’이라는 이름은 조금 독특해서 처음 들었을 때 그 뜻을 바로 짐작해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제일 먼저 ‘무쇠’ 혹은 ‘무쇠솥’ 같은 단어를 떠올리게 되는데, 무쇠달 마을의 ‘무쇠달’은 다름 아닌 ‘무쇠다리’를 뜻한다고 합니다. 오래 전 이 마을에는 무쇠다리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때문에 마을의 이름이 ‘무쇠달 마을’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수철리 무쇠달 마을이라 불리지만 수철리의 옛 지명도 ‘수철교(水鐵橋)리’ 였습니다.
마을의 상징이었던 무쇠다리가 지금은 비록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조형물을 무쇠달 마을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희방사와 무쇠다리에 얽힌 설화

‘무쇠달 마을’이라는 이름은 신라시대 때부터 마을에 놓여 있었던 무쇠다리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호랑이와 스님, 그리고 경주 호칭과 그의 딸이 등장하는 이야기, 마을의 무쇠다리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를 소개합니다.

  • 은혜 갚으려던 호랑이, 은혜 갚은 경주 호장


  • 신라 선덕여왕 12년(서기 643년), 태백산에서 수행하던 두운스님이 소백산으로 터를 옮겼습니다. 스님은 암자 하나 없는 산 속 동굴에서 홀로 생활하며 도를 닦고 있었는데 이 동굴에는 호랑이 한 마리가 찾아와 종종 스님의 벗이 되어주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는 달리 호랑이가 입을 벌린 채 몹시 괴로워 하며 스님이 있는 동굴을 찾아왔습니다. 걱정하는 마음에 호랑이의 입속을 들여단본 두운스님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름 아닌 은비녀 하나가 호랑이 목에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황급히 비녀를 빼내 호랑이를 구해준 두운스님은 산 중 짐승들을 두고 사람을 해친 것에 대해 호랑이를 크게 꾸짖었고, 호랑이는 자신의 잘못을 아는지 모르는지 의기소침해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비록 크게 꾸지람은 들었지만 호랑이는 자신을 살려준 스님에게 은혜를 갚을 요량으로 큰 멧돼지 한 마리를 물고 와 두운스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이를 본 두운스님은 또 다시 호랑이를 크게 나무랐습니다. 불도를 닦은 스님에게 멧돼지는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 호랑이는 돌아가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두운 밤, 두운스님이 어떤 기척을 느껴 동굴 밖으로 나가보니 호랑이가 그 앞에 서 있었습니다. 호랑이는 스님의 옷자락을 물고 어딘가로 스님을 이끌었습니다. 그렇게 호랑이를 따라가 큰 바위 앞에 멈춰선 스님은 바위 위에 놓여있는 어렴풋한 물체를 발견하고 자세히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러자 어스름한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아닌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아리따운 젊은 여인이 아닌가! 어리석은 호랑이가 스님의 뜻도 모르고 또 다시 은혜를 갚겠다며 사람을 해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처녀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고, 놀란 스님은 황급히 처녀를 들쳐 업고 동굴로 돌아왔습니다. 두운 스님은 여러 날 동안 뜨거운 물을 끓여 먹이고, 산에서 구할 수 있는 약초를 달여 먹이는 등 극진히 처녀를 병간호 하였고, 그 정성을 아는지 처녀는 이내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깨어난 처녀에게 스님은 어찌된 일인지 그 연유를 묻자 처녀가 말하기를, 자신은 경주 호장 유석의 무남독녀이며, 혼례를 치르고 신방으로 향하던 밤에 갑자기 몸이 하늘로 들리더니 그 후로 의식을 잃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 곳이었다는 것입니다.

    두운 스님은 며칠 더 처녀의 기력을 회복되기를 기다렸다가 처녀를 남장시켜 경주로 데려갔습니다. 먼 길을 걷기에도, 또 스님과 함께 긴 여정을 하기에도 남장이 더 편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갑자기 사라진 하나밖에 없는 딸을 애타게 찾아 헤매던 부모에게 딸이 멀쩡히 살아 돌아 왔으니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있었을까. 경주 호장은 크게 기뻐하며 마을에 잔치를 열고, 딸을 간병하여 무사히 경주까지 데려다 준 두운스님에게 보답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두운 스님은 이를 정중하게 거절하였으나, 경주 호장은 스님이 편안하게 수행 할 수 있도록 소백산 자락에 암자를 하나 짓고, 그 암자로 향하는 길의 개천에 무쇠다리를 놓아주었습니다.

    그렇게 두운 스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경주 호장 유석에 의해 만들어진 ‘무쇠다리’는 ‘무쇠달 마을’이라는 마을의 이름으로 남아 있으며, 그때 지어진 절이 지금의 ‘희방사’입니다.
    ‘기쁠 희(喜)’ 두운 조사의 참선방을 상징하는 방(方)자를 쓴 희방사의 이름에는 하나밖에 없는 딸을 무사히 되찾은 아버지의 기쁜 마음이 서려 있습니다.



죽령옛길에 얽힌 설화 ‘마을의 수호신, 다자구 할머니’

오랜 옛날 산적이 들끓던 죽령옛길에서 산적을 소탕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홀연히 사라진 ‘다자구 할머니’는 예로부터 죽령옛길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여겨졌습니다. ‘다자구야, 들자구야’ 혹시 어디선가 들어본 것처럼 익숙하진 않으신가요?
다자구 할머니 설화를 읽어보면 아하, 하고 무릎을 탁 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 ‘다자구야! 들자구야!’ 마을의 수호신, 다자구 할머니


  • 지금은 죽령옛길로 불리고 있지만, 오래 전 이길이 옛길이 아닌 ‘죽령길’ 혹은 ‘죽령고개’로 불렀을 때의 일입니다. 지금은 한적하고 고즈넉한 숲길이지만 그 옛날, 죽령길은 산세도 험했으며, 한양으로 가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지나던 길이었습니다. 과거를 치르러 떠나는 선비들은 물론, 한양과 지방을 오가는 관료들, 어깨와 지게에 그들의 생계와 꿈을 싣고 걸었던 상인 등 많은 행인들과 더불어 많은 물자들도 함께 이동했던 길이었습니다.

    그랬던 만큼 죽령길에는 자연스레 산적들이 자주 출몰하게 되었고, 관군들은 산적을 소탕하기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당시 산세가 험했던 죽령길에서 산 지리에 밝은 그들을 소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산적들의 횡포는 날로 심해지고, 골머리를 앓고 있던 관군에게 어느 날 산적에 의해 아들을 잃은 한 할머니가 한 가지 제안을 해왔습니다.
    자신이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산적들에게 접근해서 그들이 모두 잠들면 ‘다자구야’, 깨어있을 때는 ‘들자구야’라고 외쳐 관군들에게 신호를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뾰족한 수가 없던 관군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계획대로 할머니는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양 ‘다자구야, 들자구야’ 하며 산속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죽령길에서 이런 할머니를 발견한 산적들은 아들을 찾고 있다는 할머니의 말에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고 오갈 데 없는 할머니를 자신들과 함께 생활 할 수 있도록 받아주었습니다.

    그렇게 산적 무리 속으로 들어간 할머니는 언젠가 큰 소리로 ‘다자구야’하고 외칠 기회를 엿보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할머니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산적 우두머리의 생일날, 산적 무리들이 대낮부터 모두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는 다시는 없을지도 모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숲 속에 매복한 채 할머니의 신호만 기다리던 관군들은 ‘다자구야’ 소리가 들려오자 곧장 산적 무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고, 뒤늦게 깨어난 산적들은 놀라 도망치려 했으나, 그 때는 이미 관군들이 들이닥친 후였습니다.

    이렇게 할머니의 기지 덕분에 죽령길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 일이 있은 후 할머니는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고, 그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다자구 할머니’가 죽령 산신이 되어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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